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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디모데전서 6장 6절 - 8절] 지족하는 마음과 부의 위험

[디모데전서 6장 6절 - 8절] 결론과 인사 / 지족하는 마음과 부의 위험

 

1.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6절)

 

'지족'(헬, 아우탈리케이아)이란 스토아 철학 중의 한 표어였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한 '자족'(自足)을 가리킨다. 즉 밖의 모든 사정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온전한 심적평화를 가지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 '지족'이란 이단 사상의 전파자들이 희구하는 물질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경건한 마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즉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 '경건한 마음'을 가진 자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살게 된다(참조, 마 6:33; 19:29).

 

물론 여기서 말하는 풍족함은 물질적인 부(富)라기 보다는 영적인 풍요함을 가리킨다. 사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는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의 부를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는 결코 가난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얻어진 만족을 얻길 바라는 것이다(참조, 빌 4:11). 이처럼 성도는 하루하루가 바로 천국에서 사는 삶이 될 수 있어야 한다.

 

2. '부'(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7절, 8절)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매일 공급하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足)한 줄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성품, 마음, 영혼을 세상 사느 동안에 청결히 하는, 즉 경건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편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문자적인 측면에서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정당한 부의 축적마저 부인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만을 취하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어느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생활해야 하느냐에 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즉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관심 이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계획하심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참조, 마6:33).

 

그러므로 이 세상 삶에서의 '자족'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잊게 하며 하나님과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한다(참조, 욥 1:21; 전 5:15). 이 세상에서 행복을 판가름하는 관건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졌느냐, 얼마나 훌륭한 외모와 지위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느냐, 미래마저도 그렇게 만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3.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되는가? (9절)

 

인간의 심성 밑바닥에는 무엇을 소유해 보려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이 욕구가 죄악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물질의 획득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실제로 그것을 얻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잘못된 삶의 형태이다. 결국은 이러한 삶을 사느 자는 죄악의 올무에 빠져 망하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절의 말씀은 곧 불건전한 방법을 불사르고서라도 부하려 하는 자들이 끝내 멸망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그 첫째 단계는 '시험과 올무'에 빠짐을 가리킨다. 오직 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마귀의 올무(참조, 딤후 2:26)에 빠져 모든 인격과 사건을 이용해서 물질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참조, 약 5:1-6).

 

둘째, 그는 해로운 정욕에 바지게 된다. 즉 재물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참조, 약 1:15)는 그로 하여금 욕망에 눈이 어두운 존재로 만든다. 사실 물질에 지나친 관심이 있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로 인하여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국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 즉 몸과 영혼의 완전한 파멸에 이르고 만다(참조, 고전 5:5; 살전 5:3; 살후 1:9). 이처럼 물질은 인간을 궁국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같은 말씀(눅 12:16-21; 16:19-31)이나 격언들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의 뜻을 바로 깨닫고 그 말씀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결코 불건전한 욕구로 인해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참조, 히 13:5).

 

4. 돈을 사랑함으로 생기는 위험은? (10절)

 

돈 그 자체는 악하지 않으나 그 돈을 사랑하며 모든 관심을 거기에 집중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결국 믿음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양심마저 더럽히게 된다.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돈을 사모하는 자들'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교훈을 전한 자들이나 그것을 따른 자들을 가리킨다(5절). 이들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마저 돈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게 된다.

 

즉 이들은 신앙보다는 물질에 더 마음이 있기 때문에(이들의 신은 곧 돈이다) 신앙을 잃게 되며 결국은 양심의 가책과 영적 고민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만다(참조, 눅 16:19-21; 갈 5:16, 17).

 

이상과 같이 불안전하고, 있다가 없어지며 없다가도 있는 이 세상의 것 특히 돈을 사랑함은 헛된 것을 사랑함과 같다(참조, 눅 12:13-21).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무엇이 영원히 가치있는 것이며 또한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참조, 시 89:33; 마 24:35; 요 6:27; 고후 4:18; 벧전 1:24. 25).

 

물질 만능주의에 깊이 물들어 돈으로 모든 가치를 판단하려 드는 오늘날 우리 믿는자들 가운데서도 물질의 노예가 되어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양심을 속이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교회 안의 질서와 권위마저도 돈에 의해 결정되는 안타까운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들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위치를 회복해야 한다.

 

5. 돈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위험은? (10절)

 

첫째, 만족시킬 수 없는 갈증을 일으킨다. 인간의 욕구는 한이 없기 때문에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참조, 전 5:10).

 

둘째, 재물에 기반을 둔 안전이란 쉽게 무너진다. 사람이 얼마의 재산을 모아 안전을 느끼면 보통 안락과 사치를 꿈꾸지만 재물로는 가장 고귀한 것인 건강, 사랑, 평화, 생명을 살 수 없다. 더우기 재물에 기반을 둔 잠시의 안전과 안락도 믿을 것이 못된다(참조, 잠 23:5; 27:24).

 

세째, 재물은 사람을 이기적, 경쟁적으로 만든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자는 자기 때문에 남이야 굶거나 손핼르 보거나 아랑곳 없다. 오히려 그러한 자들에게 있어서 타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참조, 암 2:7).

 

네째, 재물은 평안보다는 오히려 근심과 염려를 가져다 준다. 재물이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평안할 것 같지만 그것을 잃을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치부할까 염려하는 걱정이 더욱크다(참조, 잠 2:22, 23).

 

다섯째, 재물은 사람을 죄악의 길로 인도하여 결국은 고통과 후회 가운데 있게 된다. 즉 재물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하나님과 인간 모두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양심마저 잃어 후회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이 된다(참조, 욥 27:16, 17).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은 재물에 지배받는 자로서가 아니라 재물을 지배하고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의 분량에 따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특별히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삶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여 돈을 사랑하는 것은 곧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참조, 약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