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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디모데전서 6장 1절 - 2절] 훈계와 책임 / 종

[디모데전서 6장 1절 - 2절] 훈계와 책임 / 종

 

1.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마지막 훈계는? (6장)

바울은 디모데 개인을 향한 훈계와 함께 당시 초대 교회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여러 주제들을 들어 교훈하였다.

 

즉 바울은 당시 사회 제도 중 하나였던 노예 제도 하에서 종의 신분으로 있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였으며(1절, 2절) 초대 교회에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로 인해 발생할 불경과 교만에 대해 경고하였다(3-6절).

 

또한 부자들과 그 부 자체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 함으로써 자신의 소유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과 그 재물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훈계하였다(7-10, 17-19절).

 

한편 디모데 개인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바울의 교훈을 지키며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되 책망받을 것이 없이 깨끗함을 유지하라고 명하였다(11-16, 20, 21절).

 

바울 당시의 부패했던 사회상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이 호흡하는 사회 전체는 부정과 부패와 불륜 그리고 불경건 등의 죄악이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암울한 세태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바는 빛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참조, 시 119:105)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향하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하시며 경건에 힘쓰며 맡은 사명을 감당해 줄 것을 요청하신다.

 

2. '멍애 아래 있는 종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이가? (1절)

이는 자유가 완전히 박탈되어 주인의 권위 아래서생활해야만 했던 로마시대 당시의 노예들을 가르킨다. 여기서 '멍애'란 무엇을 끌기 위해 짐승의 목에 매는 기구를 가르키는데 이것은 결국 그 당시의 노예들이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았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외국과의 여러 번의 전투를 통하여 많은 식민지와 노예들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런 전쟁을 통하지 않고도 주위의 약소 국가들로부터 노예들을 수입할 수 있었다. 또한 가난한 자유민들 중에 빚을 청산하지 못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 결과 로마는 노예의 노동력으로(자유민보다 노예의 수가 약 4배 가량 많았다고 함)유지되는 도시가 되었고(심지어 군인까지) 자유민들은 일손을 놓고 육체적 향락과 사치로 시간을 보내었으며 노예와의 불륜등으로 사회 전체가 극도로 타락해 갔다.

 

이러한 정황 아래 있던 로마에 진리와 자유를 주창하는 기독교가 접목되자 자연히 노예계층의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 노예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를 망각하고 자신의 주인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등 '멍에'를 벗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거나 주어진 임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본절의 내용으로 충고하였다. 그런데 바울의 이 같은 가르침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바울이 뜻하는 바는 주어진 현 상황(제도)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에 소속된 자이다.

 

3. 종들이 자신들의 상전들을 공경해야 할 이유는? (1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의 가르침에 손상을 입히거나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노예(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에게 불손하거나 자신의 일에 태만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주인이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노예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말아야 했다.

 

사실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여 불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면 하나님과 교회를 비난할 거리만 세상에 주게 된다.

 

따라서 바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노예의 신분인 성도들은 그의 상전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는 오늘날의 노사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근로자는 자신의 사용자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함으로써 모든 이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참조, 딛 2:9).

 

4. 사회악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1절, 2절)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오직 사랑과 인내로써 이 세상의 악이 소멸될때까지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피는 피를 부르고, 악을 소멸시키겠다고 싸우는 자들의 방법이 악하며, 그렇게 되면 결국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만일 혁명이나 물리적인 힘의 방법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었더라면 예수께서도 혁명 투사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끝없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자기 희생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참조, 히 12:2, 3).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악에 대한 효과적인 응징이며 정의를 실현하는 올바르고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사랑과 인내만이 이 세상에 피흘림이 없는, 억눌림이 없는, 미움이 없는 삶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세상의 악을 물리치려면 먼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하며 거듭난 그들이 사랑과 인내를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참조, 요 12:24).

 

5. 바울의 훈계는 결국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것인가? (1절, 2절)

실제로 초대 교회는 노예 제도를 반대하여 그 제도를 없애거나 그 제도에 대항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태도였다. 만일 교회가 노예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 제도에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면 교회는 반란과 선동의 책임을 지고 폭력집단으로 오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로써 위정자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스스로 노예를 해방방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사랑과 인내의 방법은 매우 지루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그러한 방법이 부패한 인격과 사회에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노예 제도를 지지했다기 보다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속에 만영되어 있는 사악한 정신과 타락한 제도를 개선해 가려면 먼저 내가 변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면 보다 많은 '내'가 변화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참조, 마 7:3-5).

 

6. 믿는 상전이 있는 노예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2절)

믿는 노예들은 자신의 주인이 주 안에서 한 형제라 하여 게으르거나 거만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과 더불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여 더욱 열심으로 섬겨야 한다.

 

더우기 자신들의 봉사로 유익을 얻을 자인 상전이 바로 자신들의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에게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이고, 서로 사랑해야 할 주안의 형제라는 사실은 자신의 권리를 최대화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맡은 일을 더욱 성실하게 행하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늘날 노사간에 있어서도 모두가 믿는 이들이라면 먼저 서로 아껴주고, 이행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공동체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참조, 마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