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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디모데전서 5장 3절 - 16절]훈계와 책임 / 과부

[디모데전서 5장 3절 - 16절]훈계와 책임 / 과부

 

1. 바울은 과부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했는가? (3절)

 

그는 참과부, 즉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돌보아 줄 친척(자신의 자녀까지도)마저도 없는 외로운 여자를 경대하라고 했다. 물론 본문에는 남편과 사별한 과부 뿐 아니라 생계 능력이 없어 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여자에게까지 도움을 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경대하다'라는 말에는 예의를 갖추어 존경하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원조까지도 아끼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은 '참으로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돌보라' 혹은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과부를 돌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에는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과 더불어 일부 다처제(一夫多妻制)의 성행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려져 혼자된 여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당시 교회는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참조, 행 6:1).

 

성경에서는 이곳 뿐 아니라 과부를 보살펴 줄 것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과부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며(참조, 심 10:18; 24:17; 시 68:5; 149:9) 특별히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참조, 출 22:23). 또한 과부에 대한 배려가 곧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다(참조, 사 1:17, 18).

 

한편 신약에서도 과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참조, 막 12:42, 43; 눅 7:11-17; 18:3, 5). 더우기 조대 교회 안에 집사 제도가 생기게 된 큰 원인으로서 과부를 보살피는 일을 들 수 있다(참조, 행 6:1-6).

 

그런데 초대 교회 안에서는 과부와 외로운 자들을 돕는 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므로(참조, 행 6:1-4) 교회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에 대한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교회들은 적은 예산만을 구제비로 할당하고 있으며 구제 대상의 선정도 합당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그 방법에 있어서도 효율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혜롭고 능률적으로 구제를 하되 단지 얼마의 물질만을 나누어 주는 선심을 쓸 것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들이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도움을 받고 나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즉 도움받는 자가 참으로 유익이 되는 구제를 베풀어야 한다. 이런 선행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한 단면이다(참조, 약 1:27).

 

2. 과부의 자녀나 손자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4절)

 

과부의 가정 교육을 의심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초대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적어도 목회자를 위시한 교회 전체가 그 과부의 가정에 아버지 대신으로 자녀에게 대한 바른 가정 교육을 실시하여 그 과부에게 근심을 덜어 주는 실제적인 보살핌을 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 가르침 중에 하나가 과부의 자녀나 손자는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부모가 가까운 친척을 봉양해야 하는 자녀들의 의무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종교적 의무에 속하였다(참조, 신 10:18; 24:17; 시 68:6; 사 1:17).

 

초대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으며 바른 인간의 질서라 할 수 있는 효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부모를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또한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뜻이다(참조, 출 20:12).

 

동서 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마땅한 도덕이며 종교의 덕목으로 전해져 왔으나 요즘은 사회가 핵가족화 되다보니 그러한 사상은 많이 퇴락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경건의 훈련이라는 차원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적극 권장하여야 하며 특별히 혼자서 가정 교육을 감당하기 힘든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의 자녀들을 교회가 책임지고 교육시킬 수 있어야 한다.

 

3 참과부의 자격은? (5절, 6절)

 

참과부란 남편 있는 자와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여자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여기서 참과부의 자격을 정한 것은 시시 비비가 없이 구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즉 구제를 집행하는 집사들(참조, 행 6:1-6)이 정에 이끌려 경제적 능력이 있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구제하고 반드시 구제 받아야 마땅한 가정을 소외시킨다면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따를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참과부는 외로운 자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이다(참조, 눅 2:37).

 

생계 능력이 없을 뿐더러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제공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 인격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하나는 완전한 좌절일 것이고 또 다른 반응은 살아 계셔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를 향해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다(참조, 시 50:15; 123:1, 2).

 

한편 당시에는 사회 전체가 풍요롭지 못했으며 고용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과부들은 교회의 일을 거들어 주면서 생계를 잇든 아니면 매춘(賣春) 등의 부도덕하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과부'를 경대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와 주어야 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는 복음 전파 사업과 아울러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셨던 바이기도 하다(참조, 눅 12:33).

 

4. 바울은 신자들이 지켜야 할 가족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8절)

 

신자들은 당연히 자기의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고 가족의 평안을 꾀하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일반 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그들의 신앙 고백이야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기 때문에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말이다(참조, 롬 2:14; 고전 5:1; 빌 4:8).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이혼한 부부 사이의 자녀들이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늙고 병약한 노인들이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등의 가정 문제가 심각했다. 이는 한 가정의 일로 그치지 않고 교회와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

 

만약 신앙인의 가정에 이러한 불성실하고 비인간적인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모르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하고 당신을 신앙한다고 떠벌이는 자의 예배와 헌금을 기뻐하시지 않는다(참조, 사 1:10-17). 즉 이들의 열매 없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성실한 봉사와 희생적인 사랑을 당신을 참되게 신앙하는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신다(참조, 마 25:34-40).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경건은 인간에게 대한 관심과 사랑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참조, 약 1:27). 이런 사실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분명히 죄이다(참조, 약 4:7).

 

5. 과부로 명부에 올라갈 수 있는 자의 자격은? (9절, 10절)

 

여기서 과부로 명부에 올라간다는 것은 교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며 기타 구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나이가 육십이 넘어야 하며,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여야 한다. 또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자녀를 양육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환난당한 자를 구제하며,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한다. 

 

첫째, 하필 육십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생계 능력이나 재혼의 가능성 등을 고려한 조치일 것이다. 즉 그 나이가 되면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런 규정을 둔 것 같다.

 

둘째, 당시는 결혼 관계가 문란하고 이혼이 잦은 시대였으므로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오를 사람은 순결과 정조의 모범이 요구되었다. 물론 이 같은 규정은 남편과 사별한 과부의 재혼을 방지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교회 전체를 향한 덕스러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되어져야 했다(3:2).

 

세째, 그들에게는 젊은 날 교회와 이웃에게 선한 사업을 했던 증거들이 있어야 했다. 그 사업 중에는 자녀의 양육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자녀 뿐 아니라 고아들도 성심껏 돌본 사실을 말한다.

 

넷째,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있다. 이는 숙박시설이 미비했던 그 당시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미덕이었다. 즉 성도들은 여행하는 성도들 또는 의지할 곳 없이 이곳 저곳을 전전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했다(3:2).

 

다섯째,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은 종이나 하는 천한 일로서 여기서는 이웃과 나그네를 위한 겸손하고 헌신적인 봉사를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명예도 칭찬도 초월할 수 있는 일군이어야 한다(요 13:5).

 

여섯째, 환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돌보는 일이다. 교회라는 유기체에서는 어떤 한 개인의 아품이 곧 교회 전체의 아품으로 화(化)할 수 있어야 한다(참조, 고전 12:26). 만약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교회와 그 소속원들은 병들었거나 죽은 상태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환난에 처한 형제를 돌보아 주는 일은 성도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부분이며 그 일을 행한 자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모든 선한 일을 좇아야 한다. 즉 이것은 단순한 선한 양심과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온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그의 삶이 정결했고 교회에 덕을 끼쳤으며 지금도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될 만한 늙은 과부들에 대해 교회는 그들의 여생을 책임지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노인 문제가 심각한 이때 교회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인 효를 생활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거룩한 가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가꿔가야 할 것이다.

 

6.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는 이유는? (11절, 12절)

 

젊은 과부들은 아직 나이가 있기 때문에 다시 시집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제가 절실히 요구되는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젊은 과부'란 60세 이하의 사람을 가르킨다. 그런데 그 젊은 과부들이 교회의 인정을 받아 일평생 헌신을 서원하고 교회의 구제 대상이 되었다가도 결혼할 기회가 생기면 봉사 활동을 그만 두고 결혼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여기서 '정욕으로'란 말은 젊은 기력을 따라 행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젊은 과부들은 아직 젊은 기력이 남아 있어서 재혼할 남편감이 생기면 자기가 일평생 헌신을 다짐했던 교회의 직분을 과감히 내어 놓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과부의 재혼 그 자체는 죄가 아니나 재혼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이행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바 직분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 즉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한 사랑과 헌신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한편 '처음 믿음을 저버린다'는 말은 예수께 대한 신앙을 변절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가 과부의 명부에 등록할 때 행한 맹세(재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일생 동안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 등)를 저버렸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같은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악행으로 간주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되며 자기 양심과 이웃들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위험성을 안고 있는 젊은 과부에 대한 구제 활동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7. 바울이 말한 젊은 과부들의 그릇된 행동들은? (13절)

 

그 당시 할 일 없는 젊은 과부들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남의 이야기를 옮기며, 쓸데 없는 말을 하는 가운데 교회 내에 문제거리만 만들었다.

 

이것은 그들의 게으름에서 비롯되었다. 즉 그들은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함은 물론 자신의 일상 생활마저도 게을리 하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긴장되어 있지 못하고 쉽게 남의 말을 하게 되며 교회 전체에 분란을 초래하는 악담이나 거짓말 또는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분주하게 생활할 때에는 결코 타인의 험담이나 하고 다닐 시간이 없을 것이다(참조, 잠 25:7; 딛 2:5).

 

그러므로 홀몸으로 자유스런 생활을 하는 과부 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항상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자신을 훈련시키고 더 나아가 교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의 게으름은 곧 나와 이웃과 교회를 소란하게 만들 뿐이다.

 

8. 젊은 과부들을 위한 바울의 충고는? (14절)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적'이라 함은 사단이나 혹은 교회를 비방하는 무리를 가리킨다.

 

바울은 늘 교회가 외부 세계로부터 악평의 대상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해 왔다. 또한 당시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성도들의 친교와 변화된 생활이었다(참조, 약 2:7; 벧전 2:12; 4:4, 14, 15).

 

이러한 관점에서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밈은 그 자신에게 뿐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즉 바울은 과부의 재혼을 권장하였으며여자들의 특권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아이를 낳고 집안을 관할하는 일을 적극 추천하였다. 이처럼 자기의 일에 충실할 때 교회는 폄론(13절)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며 외부로부터의 비난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게 평안한 삶과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9.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다'란 의미는? (15절)

 

처음 믿음을 버리고 오히려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자가 된 것을 뜻한다.

 

즉 젊은 과부들 중 믿음의 길에서 떠나 부정한 남녀 관계와 같은 일을 저질러 타락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물론 환경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결과로 빚어진 일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믿음 생활을 포기한 자는 반드시 사단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젊은 과부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위험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나약함을 한탄하며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탄식한 적이 있다(참조, 롬 7:17-24).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말고 항상 타락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아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뢰해야 한다(참조, 히 12: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의 눈 앞에는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10. 믿는 여자들로서 과부의 친척되는 자들의 의무는? (16절)

 

그들은 친척 과부를 도와 주고 교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교회로 하여금 참과부를 도와 주게 함이다.

 

여기서 '믿는 여자'란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그녀가 과부이든,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여자이든, 아니면 건실한 믿음의 가정의 여자이든 그녀의 친척 중에 과부가 있는 자로서 친척 과부를 도와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르킨다.

 

이렇게 유족한 여자가 자신의 친척인 과부를 돌보아 줌으로서 교회가 참과부를 도울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는 데 힘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 교회의 제도적인 구제 기능을 떠나서 성도들은 설혹 불신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친척이 어려움을 당한 경우에는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4절, 8절). 자신의 주위 친척(가족)을 돌보지 않으며 대교회, 대사회에 봉사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도움이란 결코 자신의 자비와 구제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자기 친척 또는 이웃과 함께 그 어려움에 동참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참조, 잠 19:17; 마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