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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디모데전서 5장 17절 - 20절]훈계와 책임 / 장로

[디모데전서 5장 17절 - 20절]훈계와 책임 / 장로

 

1. 교회는 장로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17절)

 

교회는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들(교회의 행정과 치리를 담당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 잘 대우해야 한다.

 

여기서 '다스리다'(헬, 프로이스테미)라는 말은 교회의 감독권(치리권)을 의미하는데 주로 행정적인 업무의 일을 말한다. 또한 '배나 존경할'이란 말은 '배나 지불한다'는 의미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이는 단순히 정신적인 예우 뿐만 아니라 물질적 공급까지도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장로에게는 존경과 적절한 보수가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게다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들(요즈음으로 말하면 목사 또는 감독들)은 더 잘 대우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한 교회의 영혼의 건강을 책임지고 교육과 치리 등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교회가 정신적인 예우 뿐 아니라 물질적인 배려도 아끼지 않는 것은 성경이 명하는 바로서 정당한 것이다(참조, 갈 6:6). 교인들 중에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목회자 예우 문제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발상으로서 자신의 영혼보다 물질에 더 관심을 가진 자의 악행이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어서 장로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교회를 섬기지만 목사들은 교회로부터 일정액의 보수를 받는다. 이에 있어서 교인들도 목사들을 잘 섬겨야 하겠지만 목사들도 지나친 요구를 하여 교회의 재정을 어렵게 하거나, 성도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 목회자들은 물질에 있어서만은 초연하길 바라는 것이 일반 성도들의 마음이다(참조, 살전 2:4; 살후 3:7-9).

 

2. 초대 교회에 있어서 장로는 어떠한 직책이었는가? (17절)

 

장로(헬, 프레스부테로스)란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제일 오랜 교직이다. 유대교에도 장로가 있었는데 그 기원은 모세의 70장로까지 소급된다(민 11:16).

 

유대 사회에서는 회당마다 장로가 있었는데 그들이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며, 회당의 예배를 사회하며, 필요한 경우에 사람들을 견책, 훈련하고, 백성들 가운데 발생하는 도덕적, 종교적, 경제적 다툼과 분쟁을 판가름해 주었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서 장로와 감독(헬, 에피스코포스)은 별로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진 직책들이다. 즉 교회마다 장로가 있었는데(행 14:23)이들은 교인들을 돌보아 주는 감독들이라는 말로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목회 서신에 나타난 장로와 감독의 자격은 동일하였다(3:2-7; 딛 1:6-9). 또한 바울은 같은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장로라, 다음에는 감독이라 칭하기도 했다(행 20:17, 28).

 

그러나 같은 직책으로 여겨진 장로와 감독 사이에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었다. 즉 엄격히 말해 장로는 교회의 행정과 치리를 맡고 있는 어른이자 지도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따라서 연로하고 경험있는 자들 중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자가 장로의 직임을 수행했다.

 

반면 감독은 교회의 생활과 교육과 사업을 감찰하는 직능과 직무를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 조직(특히 장로 교회) 안에 정착된 장로와 목사직(감독직)은 초대 교회에 존재했던 장로와 감독직의 발전되고 전문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오늘날에 있어서 장로란 주로 교회의 행정과 치리를 행사하고 있으며 목사는 가르치는 일과 교회 전체의 성숙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더불어 장로의 직책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두 직책의 존재 목적은 분명히 하나님과 그 교회를 위한 것이지 자신의 치부와 권위(권력)를 획득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3.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쒸우지 말라'는 의미는? (18절)

 

이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당연한 일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귀절은 신명기 25:4로부터 인용되었으며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귀절도 눅 10:7에서 인용하였다.

 

한편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타작 방법은 곡식단을 풀어 타작 마당에 펴 놓고 그 위를 소가 지나가게 하거나 소가 끄는 타작 기구가 지나게 하였다. 그 때 주인은 소 입에 망을 싀우지 않고 일하는 동안 그 곡식을 마음대로 먹게 했다.

 

그러므로 본절의 말씀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도 충분한 곡식을 제공하는데 하물며 주께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정력을 온전히 바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고전 9:9, 14).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숨어서 봉사하고 있는 일군에게도 사랑과 격려를 보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내어 일을 하는 자는 자신의 자비와 능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드러내지 않고 봉사하는 일군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과 충성을 실천한다(참조, 마 6:3).

 

4. 장로에 대한 송사는 어떤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가? (19절, 20절)

 

두세 증인이 없으면 송사가 성립될 수 없다. 반면에 범죄한 장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여야 한다.

 

장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회 안과 밖에서 늘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의와 근거 없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혐의가 없는 사실로부터 장로를 보호하기 위해 장로를 고소하려면 항상 두세 명의 증인이 요구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한 사람의 죄를 판결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는데(신 19:15) 이 같은 규정은 무흠한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도 적용되었다(마 18:15-17; 고후 13:1).

 

그러나 일단 장로의 범죄가 발견되었을 때에는 그에 대한 징계를 온 교회 앞에서 행하여 다른(나머지) 장로들로 두려워하게 하여 또 다른 범죄의 가능성을 방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징계를 남용하게 되면 교회의 분위기가 거칠고 메마르게 되지만 징계를 소홀히 할 경우도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에 입각한 정당한 치리는 마땅히 실행되어야 할 교회의 책무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 목회자들이나 직분자들의 범죄가 많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하거나 목회자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적절한 제재가 없다면 한국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참조, 겔 34:2, 3; 슥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