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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여자들이 예배시 태도 중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고전11:4-16)

여자들이 예배시 태도 중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고전11:4-16)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어떤 여자들이 예배시 수건을 쓰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서 여자들이 수건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헬라와 근 동 지방의 여인들은 공적인 모임에서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소위 '야쉬막'이라는 수건을 썼는데 이는 남자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며 자신은 남자의 권위와 보호 아래 놓인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이 수건을 쓰지 않는 여인은 창기(娼妓) 밖에 없었을 정도로 그 수건은 여자의 정숙과 순결을 나타내는 물건이었다. 즉 여인이 수건을 쓰지 않은 것은 자기의 남편을 업신여기거나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ㅡ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진리 가운데서 교회가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시의 사회 배경 속에서 교회가 '야쉬막'을 제거할 정도로 문화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세속'과 '성'(聖)의 타협이 아니라 세속을 개혁시켜 나가기 위한 '성'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대처 방법이다.

 

(고전11:4-7) 바울은 사람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하는 것에 대하여?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4-7).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욕되지만 여자가 쓰지 않음은 오히려 머리를 민 것과 같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같은 가르침은 평상시 집안에서 생활 할 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나 예언'을 한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때나 공적인 예배시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자신이 어떤 권위 아래 있다는 표식이다.

 

그래서 공적인 모임에 임하는 남자가 자기 머리에 그 무엇을 덮는다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이 된다. 특별히 바울은 남자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했는데 이는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이 땅을 다스리며 정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직책을 부여받았음을 뜻한다(창1:23-28). 그러므로 남자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곧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에 그 권위에 순종한다는 의미로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으려거든 머리를 깍거나 밀라고 했다.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부정을 저지른 여자의 남편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잘랐으며(민5:18, 사7:20) 무가치한 자녀를 둔 어머니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므로 여자가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미는 것은 대단한 수치를 나타내는 표시였다.

 

다른 한편으로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 표식으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만 했다. 즉 여자는 남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존재이므로 수건을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수건을 씀으로 해서 자신의 정절과 순결을 드러내는 것이 되며 이것이 곧 남자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 수건을 쓰지 않는 여자는 부정한 여자로 취급되었으며 그 부정한 여자의 남편은 사회적으로 수치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수건을 착용하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로마 카톨릭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관례에 따라 미사 때에 여자들은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그 당시 통용되던 이방의 문화와 풍속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이 같은 견해를 펼친 것이다. 즉 바울의 견해는 모든 문화권에 통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바울이 이같은 견해를 펼친 것은 복음이 전파된 한 나라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지 않을 때 신자들은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복음 자체가 손상 받거나 거부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선택적 교리이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절대적 교리는 아니다.

 

이와 같이 과거의 관습들이 지역에 따라 용인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관습이 제정되기도 한다. 복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는 성도들은 이 같은 관습들이 인간의 자유와 행동을 억지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복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관습 속에 숨어 있는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 한다(딤전2:1,2).

 

(고전11:8-13)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전11:8-13).

 

바울은 말하기를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으며,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을 뿐더러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근거로 한(창1:27-28, 2:18-23) 주장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하여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되고 있던 교회 내에서 여자들의 분방한 활동을 절제시키려 했던 것이다.

 

먼저 그는 여자의 출생이 남자에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남녀간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이 땅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은 남자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며 창조 질서으 ㅣ참뜻을 바로 깨달아 방만하게 행동하거나 공중 앞에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하며, 더우기 머리에 수건을 쓰고 공식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결코 남성 우위 사상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이는 단순히 창조 질서에 근거한 남녀간의 조화로운 삶을 위한 것이지 여자는 남자에게 굴종해야 하는 하급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인격들이 동등하며 모두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다(갈3:28, 약2:5). 남자라고 해서 여자의 도움 없이 태어날 수 없으며 여자 역시 남자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남과 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차별 의식을 떨쳐 버리고 창조 질서에 입각한 ㅈ화로운 살을 사는 것이야 말로 이 땅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라 하겠다.

 

(고전11:10)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권세 아래 있는 표'를 여자들이 지녀야 한다고 설명했나?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전11:10).

 

바울은 천사들 때문에 여자들이 권세 아래 있는 표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천사들'이란 영적인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인간의 예배와 생활에 관여하여 하나님의 뜻이 바로 실현될 수 있게 하는 존재이다. 특히 이들은 성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시138:1, 눅15:10, 엡3:10, 히12:22).

 

한편 '권세'(엨수시아)란 여자의 머리 위에 어떤 질서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결국 본 절에서 이 말을 한 것은 여자가 남자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인정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자가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것은 공적인 예배에서 성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천사들을 외면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벧전1:12).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해서 남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또한 하늘의 존재들에게 정당한 예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여자는 자기의 머리 위에 이러한 권세의 표식을 해 두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당시 여자가 수건을 씀으로써 어디를 가나 인정하고 존경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헬라 지방에서 수건을 쓰지 않은 여자는 부정한 여자로 취급 되었을 뿐 아니라 모욕을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본 절에서 바울의 이같은 주장은 결국 교인들은 거리의 창녀들과는 달리 단정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하며 이 땅에 있는 ㅗ든 존재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에도 여자들의 옷차림이 시하게 노출되어 그것이 멋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성 범죄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먼저 마음을 단정하게 가져서 항상 자신의 자유와 권리만을 생각하지 말고 이웃에 대해 덕을 세우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외부로 표출되는 자세마져도 단정하게 해야 한다(롬16:9).

 

(고전11:14, 15)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머리 길이로 무엇을 말하나?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고전11:14, 15).

 

그는 남자의 머리가 긴 것은 본성이 욕되다고 가르치며, 여자의 긴 머리는 자기의 영광으로 그것은 곧 쓰는 것을 대신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남자의 머리가 짧은 것은 자연의 섭리 곧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분하시기 위한 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심연에 깔려 있는 본질적 욕구로서(롬2:14, 갈2:15, 4:8) 만약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남자임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한편 여자의 머리가 긴 것도 역시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그 여자의 명예와 권위를 세워 주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나실인'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라는 표시로 일체 머리에 칼을 댈 수가 없었고(민6:5) 그 결과 그들의 머리는 장발을 이루었다. 한편 바울의 이 같은 논리는 인간의 본성적 요구에 따른 권면이기도 하지만 1세기 헬라와 팔레스틴의 문화권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적 풍습에 맞는 권면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이처럼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그 문화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마저 포기하고 자신의 문화권 속에 뛰어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고전11:16) '변론(辯論)하려는 태도를 가진자'란 어떤 사람인가?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고전:6)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로네이코스>는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당시 변론을 좋아하던 사람들 간에 논쟁은 끝이 없이 계속되어 논쟁을 위한 논쟁이 그들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규례가 없다고 주장한 자신의 견해에 대해 분명히 변론을 좋아하는 자들의 반격이 있을 것으로 알고 더 이상 그 같은 자들과 변론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사도적인 권위에 의해 교회의 분란을 막고자 하는 바울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한편, "우리에게..... 이런 관례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란 정확하게 누구를 가르키는지 알 수 없지만 이어지는 말인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이란 귀절을 통해 당시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초대교회 안에서는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나 공식 집회에 참여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교인들의 대화와 교회 지도자들의 대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기 좋아하고 끝없는 변론을 추구하여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평안을 위해 행사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항상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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