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사건들
아브라함의 시대로부터 예수 탄생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들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스라엘과 강대국들과의 관계에 대한 신구약의 예언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시대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을 충분히 알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다 잘 이해할 것이며, 우리 주께서 사셨고, 교회가 탄생되던 시대를 보다 올바르게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처음 ~ 약 B.C. 2000)
처음에는 죄가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와 온전히 교제하면서 지냈는데, 거짓말을 믿고 나서는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에 불순종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인류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의 결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자비하시고 인애로우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여자의 씨에서 나실 구속자를 약속하셨다. 천여 년이 지나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고, 그 마음이 항상 악했다.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에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홍수가 닥쳐왔을 때 오직 방주 안에 있던 8명 즉,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이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죄성(罪性)은 변하지 않았고, 오래지 않아 그들도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한 족속이며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이 목표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가능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인간의 일에 개입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을 지상에서 진멸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미 하늘의 무지개를 두시며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사,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므로 개입하셨다.
B.C. 2000년경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셔서 갈대아 우루를 떠나 그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큰 민족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과 함께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비”로 바꾸셨다. 또한 그 언약과 함께 가난한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씨 곧 인류를 구속하실 분은 여자의 씨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아브람의 허리와 그의 자손들 즉 이삭과 야곱의 허리를 통해서 오시게 된다.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12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자신의 언약을 확증하셨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므로 이스라엘 12지파 족장들의 아비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언약의 민족이 생겨나게 하셨다. 때가 차면 언약의 사자이신 구속자가 유다 지파로부터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이 모두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형들이 라헬에게서 난 첫 아들이자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이 요셉의 목숨을 해할 음모를 꾸밀 때 루우벤과 유다의 중재로 요셉은 종으로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다. 비록 요셉의 형제들은 악한 의도로 이것을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선으로 바꾸셨다. 요셉은 보디발 집의 종이 되는 데서 출발하여, 감옥을 거쳐 바로의 궁에서 총리가 되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애굽에서 요셉의 지위를 사용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가난의 기근에서 건져내셨다. 그들은 애굽에서 도합 430년을 지냈는데 그 대부분을 종으로 살았다. 그 후 B.C. 1525년경, 이 히브리 종들 중 한 부부에게서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태어났다.
모세의 출애굽에서 사울의 왕정까지(B.C.1445 ~ B.C.1051)
모세가 태어난 지 약 80년 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스스로 계신 자(I AM),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의 집인 애굽 땅에서 건져내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려고 계획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이스라엘의 인간 구원자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의 식양을 받은 자로 섬겼다. 그 하나님은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실 구속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후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고, 그 후 여호수아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가나안 민족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 그러나 백성이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백성 중에서 사사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 백성과 함께하셨다. 그러나 사사들이 죽으면 죄와 종살이의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이스라엘에게는 가시적 왕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신 신정 국가가 되어야 했으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마침내 선지자이자 사사인 사무엘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 요구 때문에 사무엘이 근심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절했으므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셨다.
통일왕국에서 분열왕국으로(B.C.1051 ~ B.C.931)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세우셨다. 유다 족속 이새의 아들인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
다윗은 bB.C.1011년부터 B.C.971년까지 통치하였다. 이 기간 동안 다윗은 다윗성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위한 영원한 거처를 짓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진심을 보셨으나 다윗이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으므로, 성전건축은 밧세바가 낳은 다윗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솔로몬의 임무가 되었다.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고 성전을 주님께 봉헌하는 날에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 드렸다.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번제를 살랐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채웠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였고, 예루살렘의 높은 곳에 이방의 우상을 세웠다. 솔로몬이 나이 늙었을 때 왕비들은 그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쫓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국을 둘로 찢으셨다.
B.C. 931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B.C. 931년,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남한국 유다를 이루었다. 나머지 10파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루었다. 북왕국은 곧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이에 하나님은 B.C. 722년에 앗수르를 통해 북왕국을 사로잡게 하셨다.
남왕국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포로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유다는 청종하지 않았다. B.C. 605년, 느브갓네살은 바벨론 왕이 되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왕과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고 갔다. 그들 중에 다니엘이 있었다(단 1:1-2), B.C. 597년에 느브갓네살은 다시 유다를 공격하여 이번에는 1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그들 중에는 에스겔도 있었다. 그 후 B.C. 586년에 바벨론은 세계 초강대국이 되어 유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성 뿐만 아니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동안 지은 웅장한 성전까지 파괴했다.
포로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회당을 세웠다. 이 회당은 유대인들이 쉐마(신6:4)를 낭송하고 율법서와 예언서를 읽고 기도하며 설교하는 학문과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건들과 결정 사항들을 기록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서기관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까지 맡았다. 신약 시대까지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분야에서 전문가로 여겨졌는데 이들을 율법사라고도 불렀다.
신명기의 약속대로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직접 체험하고 난 유대 포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존중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식언하는 분이 아니며, 언약의 백성에 대하여 자신이 하신 말씀을 변개하시는 분이 아님을 그들은 깨달았다.
왕국이 분열되고 유다가 사로잡힌 뒤 얼마 되지 않아서 포로들은 유다 사람 또는 유대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사(페르시아) 시대(B.C.539 ~ B.C.331)
B.C. 539년, 매대와 바사가 바벨론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바벨론을 대신하여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다. 다니엘 5장은 이 침공을 기록한다.
고레스(바사 왕)가 태어나기 약 175년 전,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사44:28), 역대하 36:22-23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고레스는 조서를 내려 유다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도록 허락했다. 예레미아가 예언한 대로(렘29:10),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처음 공격한 지 정확히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무리들은 성경에서 남은 자라고 부른다. ‘흩어졌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디아스포라는 “열방의 유랑자로 남은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에스라서는 학개와 스가랴 시대 동안에 남은 자들의 귀환과 두 번째 성전 건축을 기록하고 있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을 기록하고 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동시대 인물이며 에스라는 학사로 불린다.
말라기는 하나님이 주신 구약의 마지막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예언 이후에 400년 동안 하나님은 정경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경을 영감해 주지 않으셨다.
말라기를 뒤이은 이 침묵의 400년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 하시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침묵하신 것이지만 선지자 다니엘이 기록한 많은 예언들이 이 400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성취되었다.
이 기간을 그리스도 시대, 막카비 시대, 로마 제국의 발흥기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스(헬라) 시대(B.C.331 ~ B.C.63)
그리스 시대는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네 개의 다른 왕권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안에 마카비 왕조가 들어있다.
알렉산더 대왕 통치(B.C.331 ~ B.C.323)
페르시아(바사) 제국이 성장하면서 그리스도 도시 국가들의 안전을 위협하자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페르시아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노력으로 그리스를 합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B.C. 336년에 필립이 살해당하고, 20세쯤 된 아들 알렉산더가 그리스 제국의 왕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즉위 2년 만에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고, 그의 제국은 서쪽으로 소아시아(현재의 터키)까지 확장되었다.
그 다음 2년 동안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에서 파키스탄과 애굽에 이르기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여기엔 유대지역도 포함되었다. 다른 역사가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설명도 있지만, AB 37년부터 100년까지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을 때 그가 야두아와 제사장 복장의 다른 유대 제사장들과 흰옷 입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야두아는 꿈에서 도시의 성벽에 화환을 장식하고 알렉산더를 환영하라는 말을 들었다. 알렉산더 역시 이 사건과 일치하는 꿈을 꾸었다.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으로 호의를 받아 들어갔을 때, 그는 다니엘 8장의 예언을 보았다. 그 예언의 내용은(그리스를 상징하는) 염소의 커다란 뿔에 의하여 메대-바사(페르시아) 제국이 몰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예언이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느끼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주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을 잘 대해주었고 예루살렘이나 그들이 재건한 성전을 훼손하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애굽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웠을 때 그는 그 도시에 사람을 거주하게 하려고 많은 유대인들을 격려해서 그곳에 정착시켰다. 알렉산더는 점령지에 항상 그리스 도시와 식민지를 세워 그리스 문화와 사상 그리고 언어를 도입했다. 그의 목표는 공통의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을 통한 헬라화로 그의 제국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코이네 헬라어는 그리스가 지배하는 나라들의 공용어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시대에 주요한 문명 언어가 되었다. 신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알렉산더와 전쟁에 지친 그의 군대는 B.C. 323년에 인도스강 계곡에서 바벨론으로 돌아왔다. 그가 더 이상 정복할 영토가 없었으므로 주저앉아 울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는 그해 바벨론에서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채 죽었기 때문에, 그의 왕국은 혼돈에 빠졌다.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들이 22년 동안 투쟁을 벌인 뒤에, 그의 왕국은 리시마쿠스(Lysimachus), 카산더(Cassander), 프톨레미Ⅰ 소테르(Ptolemy Ⅰ Soter), 셀류쿠스Ⅰ 니카토르(Seleucus Ⅰ Nicator)에 의해 4개로 분할되었다.(아래 도표 참조)
|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분할 | |||
| 리시마쿠스가 드라게와 비두니아를 차지함 |
카산더가 마케도냐를 차지함 |
프톨레미Ⅰ 소테르가 애굽을 차지함 |
셀류쿠스Ⅰ 니카토르가 수리아를 차지함 |
| 프톨레미Ⅰ세 소테르와 셀류쿠스Ⅰ세 니카토르는 다투는 왕조들을 계승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 땅은 그들의 담보물이 된다. |
|||
애굽의 프톨레미 통치(B.C.323 ~ B.C.204)
프톨레미Ⅰ 소테르는 애굽을 차지하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겨받았다. 유대인들은 자치를 허용받았고 종교활동을 간섭받지 않는 등, 평안을 누렸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유대인은 애굽에 갈 수 있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학자로 초빙되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애굽의 수도를 멘피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그곳을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거기서 유대인은 세계 최대이자 최고인 그리스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철학과 논리학에 심취하여 헬레니즘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프톨레미 Ⅱ 필라델푸스가 명을 내려 모세오경을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성경 전권의 헬라어 번역이 마침내 B.C. 100년경에 완성되어 칠십인역 혹은 약자로 LXX라 불렸다. 많은 신약 저자들은 이 칠십인역을 인용하였다.
이 중간 시대에 기록된 다른 문서들로는 외경, 위경, 쿰란 문서(사해 문서라고도 함) 등이 있다. 외경은 묵시록, 지혜서, 역사 문헌 등을 포함한 다양한 저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외경인 마카비 1권을 통해 역사가들은 마카비 반란으로부터 요한 힐카누스 시대까지의 기간을 파악하였다. 외경은 히브리 성경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칠십인역에는 포함되어 있다.
위경은 외경보다 더 광범위한 저작 전집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전집을 구성하는 저작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저작들은 아담, 아브랴함, 에녹, 에스라, 바룩과 같이 유명한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주장에 진정성이 없다는 데 동의한다.
쿰란 혹은 사해 문서는 B.C.200년에서 A.D.70년 사이에 유대의 한 종교 분파였던 에세네파가 기록했거나 필사한 사본이었다. 사해 근처에 살았던 에세네파 특수 공동체는 독신과 엄격히 훈련받은 공동체 생활 양식을 가지고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격리시킨 것으로 보인다. 사해 문서에서 그리스도 이전 마지막 2세기 동안 살았던 이 공동체의 삶과 신앙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 속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구약 사본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문서들의 이름은 사해 서쪽에 있는 키르베트 쿰란이라고 불리는 고대 유적 근처의 몇몇 동굴들에 은밀히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수리아의 셀류쿠스 왕조 통치(B.C.204 ~ B.C.165)
다니엘 11장에서 북방 왕조로 나오는 수리아 왕조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땅을 원했다. 안티오쿠스 Ⅲ 대제가 프톨레미 Ⅴ 에피파네스 치하의 애굽을 점령하자 예루살렘과 유대는 수리아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권을 얻은 후 안티오쿠스는 로마에게 패배 당하고 수년간 로마에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로마는 그를 확실히 복종시키려고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Ⅳ를 로마에 인질로 붙잡아 놓았다.
안티오쿠스 Ⅲ 대왕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셀류쿠스 Ⅳ 필로파토는 B.C.187년부터 B.C.175년까지 통치하였다. B.C.175년에 안티오쿠스 Ⅳ 에피파네스(로마에 인질로 잡혀간 아들)가 그의 동생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B.C.163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장엄한” 혹은 “찬란한”의 뜻을 가진 에피파네스라고 불렸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때까지는 제사장직이 생득적이고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Ⅳ 에피파네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대제사장의 형제인 야손에게 제사장직을 팔아넘겼다. 야손은 또한 성전 근처에 헬라식 경기장을 짓기 위해 안티오쿠스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였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인의 생활 방식에 매료되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정통 유대인과 헬라 유대인 사이에 커다란 마찰이 생겨났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영토는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뢰아 그리고 드라고닛으로 분할되었다. (아래 그림 참조)
이러한 갈등이 고조된 것은 이집트 왕위에 오르려는 안티오쿠스 Ⅳ 에피파네스의 시도가 로마에 의해 좌절되었을 때이다. 안티오쿠스는 이 사건 때문에, 그리고 제사장들의 반란을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헬리니즘을 완전히 수용하지도 않은 유대인들에게 분노를 쏟았다. 그는 유대교를 말살하기로 결심하였다. 할례를 금지하였으며 이에 불복종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다. 율법 사본들은 이교의 심볼들로 더럽혀지거나 불태워졌으며, 율법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는 자는 처형을 당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 또한 금지했다. 그 후에 안티오쿠스는 성전의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며, 멸망케 하는 물건인 제우스상을 성소에 세웠다(단11:31).
마침내 안티오쿠스는 그의 관리들을 그 땅 전역에 파견하여 유대인들이 제우스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했다.
![]() |
마카비 시대(B.C.165 ~ B.C.63)
안티오쿠스 Ⅳ 에피파네스의 관리가 모데인마을(예루살렘과 욥바 중간 지점에 위치함)에 도착하여 나이 많은 제사장 마타티아스에게 명령하여 제물을 제우스 신에게 바치라고 했을 때, 그 관리는 그 일이 그의 생전에 수행하는 마지막 공무가 될 줄 몰랐다. 마타티아스가 이를 거절했을 때 그보다 젊은 한 유대인이 그를 대신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그가 제물을 바쳤을 때 격노한 마타티아스는 그 유대인 지원자뿐만 아니라 수리아 관리까지 칼로 찔렀다. 마타티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마카비우스(망치잡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셋째 아들이 이끄는 마카비 반란이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 Ⅳ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힌지 3년 만에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그들은 제우스상을 없애고 성전을 재정비하였으며, 유대의 희생 제사를 다시 드리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12월 25일에 수전절을 기념했다(요10:22). 이 축제는 그 때부터 계속 빛의 절기 혹 하누카라는 연례 행사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스모니아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B.C.63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까지 마타티아스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마타티아스의 아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시몬이 살해당하자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자칭 제사장과 왕이라 불렀다.
그는 B.C.134년부터 B.C.104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했으며,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 후 힐카누스는 남동쪽으로 옮겨와 고대 에돔 왕국의 족속인 이두매인들의 땅을 정복하였다. 이 땅 사람들에겐 이주를 하든지 유대교로 개종을 하든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훗날 로마가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한 헤롯 대왕의 영토였다.

요한 힐카누스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의 한 종교 분파인 바리새파가 하시딤으로부터 형성되었다. 하시딤은 율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헌신한 전투적인 종교 집단으로, B.C.168년 경에 시작해 마카비 혁명기 동안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된다”라는 뜻인데, 강력한 헬레니즘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묘사하려고 사용했을 것이다. 신약 시대 대다수의 서기관들은 바리새인이었다.
교리적으로 바리새인들은 구약 전체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전도 동등한 권위를 받아들였다. 바리세인에게는 율법 연구가 참다운 경배였다. 그들은 사후의 삶과 부활,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믿었다. 비록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율법 해석에서는 사두개인들보다 한결 자유로웠다. 바리세파는 최대의 종교 분파였지만, 요한 힐카누스의 미움을 사서 그 수가 줄어들었다.
사두개파는 주로 상류 계급으로 구성된 좀 더 작은 종교 분파인데, 종종 제사장 혈통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개 바리새인들보다 부유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중산층 상인과 무역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두개파는 토라(구약의 처음 5권의 책)의 권위만을 인정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율법의 문자적인 해석을 고수한 반면, 신의 섭리와 부활, 사후의 삶, 천사와 마귀의 존재, 사후의 어떤 상벌도 부정하였다. 그들은 구전된 율법을 강제적이고 의무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유물론적인 사상을 가졌다.
사두계인들은 성전과 제사를 주관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이 헬레니즘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유대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아버지 요한 힐카누스를 계승한 아리스토블루스 Ⅰ는 살로메 알렉산드리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리스토블루스가 죽자 살로메는 그의 형제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재혼을 했는데, 그는 B.C. 103년에 대제사장 겸 왕이 되었다. 이 결혼으로 인하여 알렉산더 얀네우스에게는 많은 적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대제사장은 오직 처녀와만 결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B.C.76년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여자로서 제사장직을 차지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의 장남 힐카누스Ⅱ가 그 자리를 떠맡았다.
살로메가 죽자 그녀의 둘째 아들 아리스토블루스Ⅱ가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아 힐카누스Ⅱ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났다. 이에 힐카누스Ⅱ는 왕위를 포기하려고 했으나 안티파터(이두메인이자 헤롯 대왕의 아버지)가 그를 친구처럼 돌보아 주며 적법한 상족자로서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구하라고 설득하였다. 힐카누스의 군대는 아리스토블루스에 맞서 싸워 그를 무찔렀다. 아리스토블루스는 도주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자신의 요새로 삼았으나 힐카누스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이 기간 초반에 하스모니아 왕조는 북쪽 이웃인 시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와 조약을 맺었다. 한편 셀류쿠스 통치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스카우루스 휘하의 로마 군대는 이때 수리아에 주둔하였다. 스카우루스는 유대의 내전 소식을 듣고 유대로 갔다.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는 둘 다 그의 도움을 구했다. 결국 스카우루스는 아리스토불루스의 편을 들었고 예루살렘의 포위를 거두게 하였으나 싸움은 계속되었다. 한편 지원 요청을 받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은 분쟁을 해결하겠다고 말하고 그가 도착할 때까지 평화를 유지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저항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로 인해 로마의 힐카누스를 지원하게 되었다. 폼페이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았으며 석달 동안 성읍을 포위하였다.
로마 통치 기간(B.C.63 ~ B.C.70)
B.C.63년에 폰페이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병사 몇을 데리고 지성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록 그들이 성소의 기구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마음을 돌이켰고 폼페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는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였으나 이 기간 동안 약 12,000명의 유대인들이 죽었다.
로마는 하스모니아 왕조와 그들의 영토를 붕괴시켰다. 이제 유다는 영토가 축소되었고 독립을 잃었으며,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힐카누스Ⅱ는 적법한 제사장은 되어도 왕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로마 영토인 수리아 총독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스카우루스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아리스토블루스와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로 끌려갔다. 얼마 후 통치권을 이어받은 수리아의 로마 총도 가비니우스는 성전을 힐카누스에게 유임하고 유대 정부를 개편하였다.
유대 지역은 다섯 구역으로 분할되어 수리와 총독의 관할권 아래에 있는 의회가 다스렸다. 대제사장 힐카누스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임명되었고 안티파터는 그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대제사장은 사두개파와 바리세파로 구성된 71인 의회인 산해드린을 통할 했으며, 산해드린은 로마의 권위 아래에서 유대인들을 다스렸다. 산해드린이 표면상으로는 유대인의 민사 및 형사 사건에 있어서 자치권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산해드린 로마 감독관의 허가 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산해드린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종종 “공회”로 언급된다.
B.C.55년에 폼페이, 크라수스(수리아의 총독), 율리우스 가이사, 세 사람이 로마를 통치하였다. 크라수스는 자신을 또 다른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여기고, 세계 정복에 나섰다. 바로 그 전의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물들을 약탈하였다. 크라수스와 그의 군대는 나중에 파르티아에게 패하였다.
카스피아 동남부에 위치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파르티아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다. 그러나 로마는 A.D.114년까지 그들을 정복하지 않았다.
크라수스가 죽은 후에, 율리우스 가이사는 이달야를 점령하고 폼페이를 격파하려 나섰다. 폼페이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거기서 암살당했다. 이 시기 동안 안티파터는 가이사를 지원하고, 그 답례로 가이사는 그에게 유대 행정 장관이라는 공식 직함을 내렸다.
안티파터는 그의 아들 바사엘을 유대의 총독으로, 그의 아들 헤롯을 갈릴레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실카노스Ⅱ는 안티파터와 그의 두 아들에게 권위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대제사장으로 남았다.
B.C.44년, 가이사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의해 살해되고 로마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카시우스는 동부의 통치권을 얻었다. 힐카누스의 경쟁자들은 로마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권력을 잡으려 했다.
B.C.43년 안티파터가 살해당하고 파르티아의 지원을 받은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그 나라를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헤롯은 힐카누스를 도와주었고 힐카누스는 그 답례로 미리암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여자를 헤롯에게 주었고, 그들은 5년 후에 결혼하였다.
그 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마르크 안토니와(나중에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가이사의 조카 옥타비안에 의해 패배당했다. 마르크 안토니는 동방의 지배자가 되었다. B.C.40년에 파르티아가 팔레스틴을 침략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쳤다.
그해 안토니와 옥타비안의 강요로 헤롯은 유대의 왕이 되었다. 3년에 걸쳐서 헤롯이 유대지역에서 파르티아를 몰아내고 정권을 확립하였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직전에 헤롯은 미리암(혹은 마리암느)과 결혼하면서 하스모니아 왕가와 결혼하면 유대인들이 자신을 더 잘 용납하리라고 기대했다.
B.C.20년, 헤롯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이 첫 번째 성전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았기 때문에 헤롯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짓기로 결심했다. 비록 성전 자체는 1년 반 만에 완성되었지만, 성전의 외부 구조물 건축과 장식이 수년간 계속되어 A.D.26년 경의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요2:20) 이라고 말하였다.
헤롯이 백성(이두매인들)은 요한 힐카노스 치하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도록 강요 당한 바 있으며, 헤롯이 유대에 살 때 그는 단지 한 사람의 형식적인 유대교인 뿐이었다. 비록 로마는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이란 호칭을 주었지만 그가 지배한 사람들은 결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헤롯 왕 때에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2:1,2)
진짜 왕이 오신 것이다.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2:6).
헤롯은 B.C. 4년에 죽었다. 그러나 유대와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큰 빚을 보았고 그들 자신의 귀로 왕중왕이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400년간 침묵이 깨졌다.
예수의 탄생이 B.C.4년으로 보이는 이유
A.D.나 B.C.와 같은 횟수의 호칭은 6세기까지 시작되지 않았고, 8세기까지도 널리 채택되지 않았다. 이 명칭은 높이 존경받는 받던 학자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는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신학에 능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스키티아에서 태어난 496년 로마로 갔다. 523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회법 고문인 보니파티구스(교황 요한 1세 아래)는 디오니시우스에게 부활절 날들의 일람표를 작성하라고 요청했다. 당시 존재했던 일남표는 228-247년의 19년 기간을 망라했는데 그것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 통치 시작부터 계산했으며, 이는 그 당시의 관례였다. 디오니시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인 디오클래시안 황제를 높이기보다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디오클래시안의 통치에 따라 로마의 창시부터 753번째 해 12월 25일(혹은 3월 25일)이 되게 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똑같은 19년을 안노 도미니 노스트리 예수 크리스티(Anno Domini Nostri Jesu Christ) 532-550년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디오니시우스의 안노 도미니 532년은 안노 디오클레시안 248년과 같다. 디오니시우스의 날짜 계산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 일주일 후에 시작되는 해가 “주님의”, 혹은 안노 도미니 시대 1년이었다. 디오시니우스의 계산에 따르면, AD 1년은 우리 주께서 탄생하신 해일 것이다. “영”년은 없다. 그래서 전년은 B.C.1년(그리스도 이전)이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 때부터 되어진 연구는 그리스도께서 A.D.1년보다 분명히 더 일찍 탄생하셨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해롯 대왕의 통치하에 탄생하셨음을 안다. 역사는 헤롯 대왕이 우리가 지금 아는 B.C.4년에 죽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보다 더 늦게 탄생하실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없으나 B.C.4년이 종종 사용되는 해수이며, 그것이 본서의 모든 시간표에 사용된 연도이다.
그리스도부터 현대까지
많은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적이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 예수께서 오셔서 아버지를 설명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귀한 모퉁이 돌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한 번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그날이 칼날의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이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누21:20, 23-24)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면 겁나 갑자기 포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듣기를 거부했다.
예루살렘의 파괴(A.D. 70)
유대인과 로마의 지배자 사이의 갈등은 심해졌다. 로마의 역사가 카키투스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통치하기까지는 참았다고 전한다. 유대인들이 플로루스의 군대에 대항하여 봉기했을 때,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네로는 T.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에게 유대인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베스파시안은 북부 팔레스타인을 진압하고, 예루살렘과 마사다 및 다른 두 요새를 제외한 유대 전역을 장악했다.
이 시기에 네로가 자살하고 로마의 내란이 일어났다. 갈바와 오토, 비텔리우스가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로마의 동부 보병군단이 베스파시안을 황제로 선포하였고, 비텔리우스는 살해되었다. 베스파시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전쟁을 맡기고 로마로 향해갔다. A.D.70년,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이후 다섯 달 동안 100만이 넘는 유대인이 죽었다. 8월 6일, 로마군이 성전에 침입하여 예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불탔고,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함께 승리를 축하했다.
비록 유대인 일부가 마사다로 도망쳤지만 유대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A.D.72년과 74년 사이에 마사다는 로마 총독 플라비오스 실바에게 함락되었다.
하드리안과 앨리아 카피톨리나
A.D.132년 하드리안 황제는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지했다. 그는 또한 제우스를 위한 신전 건축 계획을 세웠다. 이런 행동들은 시몬 바 코크바가 또 다른 반란을 이끌도록 박차를 가했다. 바 코크바의 반란군을 진압한 후, 하드리안은 A.D. 136년에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엘리아 카피 톨리나라고 명명하고 유대인들의 도시 출입을 금하고 이를 위반한 자를 사형에 처했다. 그 칙령은 약 500년간 시행되었다.
비잔틴 시대(A.D324~638)
A.D. 324년 콘스탄틴은 로마의 유례없는 황제가 되었다. A.D.330년에 그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자신을 기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이라고 계명했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십자가의 환상을 보고 “이 표징으로 정복할 지어다.”는 말씀을 들은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 국교로 선포했다.
콘스탄틴의 어머니, 황후 헬레나는 다윗의 성(예루살렘)을 복구하고 기독교의 유적지를 정하고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장소에 성지를 짓기 시작했다. 헬레나와 성업의 주교 마키리우스는 예수님이 장사된 곳이라 여겨지는 곳에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지었다. 비잔틴 교회들은 그 지역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5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이 갈라져 동쪽 반은 콘스탄티노플의 수도를 둔 비잔틴제국이 되었다.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5세기에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 기념일인 티샤바부(Tisha B’Av)에 성전산에서 기도하도록 허용되었다. 5세기 중반에 예루살렘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디옥과 동등한 직위의 교구로 공인되었다.
A.D.614년, 페르시아는 그 땅을 정복하여 사람들을 학살하고, 교회를 파괴했다. A.D.629년, 비잔틴 황제 헤라클라우스는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했다.
초기 이슬람 시대(A.D.638~1099)
그로부터 9년 후 이슬람 교도들이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예배하도록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우마야드 왕조가 660년부터 750년까지 통치했다. 날개 달린 말 알부락을 타고 메카에서 예루살렘까지 갔던 선지자 모하메드의 여행이 성전산에 닿았다고 하여 이 성전산을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성지로 만들었다. 7세기에 칼리프 압드 알-말릭은 성정산 위에 회교 사원인 바위돔(Dome of the Rock)을 건축하라고 주문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 성지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오직 신도시(Ramle) 하나만 건설했으며, 8세기에 순레이만이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십자군 시대(A.D.1099~1244)
1099년, 교황 우루반Ⅱ의 청으로 십자군이 기독교의 성지들을 이슬람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유럽을 횡단했다. 성은 5주 동안의 포위 공격 후 십자군의 손에 넘어갔다. 예루살렘은 십자군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 귀족과 중산층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려고 모여들었다. 회교 사원들은 교회로 바뀌었고 새 교회와 수도원들이 지어졌다. 그 후 88년간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들은 예루살렘에 살지 못하고, 단지 방문만 할 수 있었다.
아유비드의 임시 통치기간 (A.D.1187~1192)
1187년 아유비드 왕조의 창시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바위 돔 꼭대기의 십자가를 파괴하고 교회를 외교 사원으로 개조했다. 이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과 함께 정착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이주해 왔다.
1192년 리차드(Richard the Lion Hearted)와 프랑스의 왕 필립(Philipe Auguste)은 살라딘이 정복했던 십자군 왕국을 회복했다. 예루살렘은 두 영역으로 나뉘었다. 성전산과 그곳의 회교 사원들은 이슬람 손에 남게 된 반면에, 그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44년에 십자군은 그 도시를 잃었다.
맘룩 시대 (A.D.1260~1517)
1260년 예루살렘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대군을 이끌고 온 이집트의 새로운 지배자 맘룩에게 정복당했다.
맘룩은 마드라사스(종교 교육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슬람 학자들과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마련했다.
오토만 시대 (A.D.1517~1917)
콘스탄티노플과 소아시아, 유럽 일부, 발칸, 이집트, 시리아로 이루어진 오토만 제국은 1577년에 팔레스타인을 합병했다. 예루살렘은 맘룩의 손에서 오토만 투루크의 손으로 넘어갔다. 술탄 술레이만 황제가 이 시기에 쌓게 한 성벽은 현재까지 남아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다. 그가 죽은 후 유대인 공동체는 시온 문을 따라 유대인 구역을 건설했을 때 더욱 견고히 구축되었다. 예루살렘과 사페드에는 유대인을 위한 학문의 전당이 설립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동(eastern)의 여러 공동체들로 갈라졌다.
1832년에 이집트의 파사 모하메드 알리는 자신의 함선을 건조하기 위해서 성지의 나무를 벌목했다. 그렇지만 그는 기독교 선교 단체와 학교, 외국 영사관, 고고학 탐사를 승인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서양의 영향력을 물밀듯이 받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 시오니즘이라는 정치 운동이 유럽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동유럽과 러시아를 떠나 아브라함의 땅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유대인을 위한 자유국가라는 데오도르 헤르츨의 비전을 신속하게 채택했고, 1897년에 최초의 오니즘 회의가 열렸다.
영국의 위임 통치 (A.D.1917~1948)
400년간의 오토만 통치는 1917년 12월 9일에 끝이 났다. 이틀 후에 영국의 야전 사령관 알렌비가 성채로 진군에 들어가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다. 벨포어 선언은 유대인을 위한 고국의 건설을 약속했다. 1920년과 1929년에 유대인과 아랍인들 간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아랍인들은 1936년에서 1939년까지 반란을 일으켰고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놓고 전면전이 벌어졌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00만의 유대인이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살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론은 유대인의 조국 건설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1947년 11월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긴장이 매우 심각해지자 유엔이 개입하여 위임통치를 종결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로 만들 것을 결정했다. 유엔은 요단강 서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나누어 아랍과 유대가 하나씩 차지할 것을 33-13으로 결의했다. 유대인은 이 계획에 동의했으나 아랍인들은 거부했다.
이스라엘 독립국가 (1948년 5월 14일)
1948년 5월 14일, 영국이 철수하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스라엘은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의 공격을 받았다. 12월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독립을 확보했으나, 요르단 군대가 요단강 서안지구(성경의 유대와 사마리아)에 남았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차지했다. 1949년 1월 휴전 명령이 선포되자 예루살렘은 분할되었다. 요르단이 순레이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소 전역을 점유했고, 예루살렘의 옛 시가지는 유대인 금지 구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 후 7년간 102개국에서 밀려 들어오는 80만이 넘는 이주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생활 조건은 척박했으나, 유대인들은 드디어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1957년까지 그들은 말라리아 균이 번식하는 훌라 계곡의 늪지대에서 물을 빼내어 갈릴리 바다의 물을 송수관을 통해 남쪽으로 흐르게 하여 불모지 네게브 사막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시내 전투 (1956년)
1956년 이스라엘은 시내 전투에서 이집트를 신속하게 제압하고, 티란 해협과 엘랏만에서의 자유 항해를 보장받은 후에 시내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후 이집트의 군대가 또 한 차례 이스라엘 국경선으로 이동했다.
6일 전쟁 (1967년)
6일 전쟁은 1967년 6월 5일에 발발했다. 그 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대, 사마리아,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골란 고원을 탈환했으며, 1800여 년 전에 발생했던 바 코크바의 반란 이래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유대인의 주권 아래 재통합했다. 유대인은 마침내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벽인 거룩한 성전산의 서쪽 벽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대속죄일 전쟁 (1973년)
1973년, 성일(聖日)들의 절정인 대속죄일(Yom Kippur)에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선에서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3주 후에 결국 침략군을 격퇴시켰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정전 협정에 조인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 조약 (1979년)
1979년 3월,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시내를 이집트에 반환하는 역사적인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레바논 지역에서 북부 이민지에 대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갈릴리 평화 작전에 착수했다.
중동 걸프전 (1991년)
1991년 1월, 미국이 이끄는 연합국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촉구로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을 향해 이라크가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중동 걸프 위기는 대략 6주 후에 끝이 났다.
이스라엘과 PLO간 평화 조약 (1993년)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이 5월 4일까지 가자지구와 요단강의 서안지구의 부분적 행정통치를 PLO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대신 평화를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무장한 팔레스틴 경찰력이 그 지역의 계속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방어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죄수들을 해방시켜야 했고, PLO는 이스라엘에 반하여 행동하는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해야 했다. 이 협정(이것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협상을 했기 때문에 오슬로 협상이라고 알려져 있음) 서명 이후, 이스라엘 병력의 예정된 퇴진이 계획보다 더 늦게 진행되었고,이스라엘 시민을 향한 테러리즘은 중단되지 않았다. 레위기 25:23 의 말씀은 우리 시대의 가슴을 사무치게 들린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로 인해 새로운 통찰력과 큰 기대감으로 예언을 주목하게 된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날에 네 제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이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지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날의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 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14:1-4, 5, 9)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경의 3 가지 정의(미슈파트, 체데카, 디카이오수네, 창 18:17-19) (0) | 2025.10.30 |
|---|---|
| 성경 개관 (0) | 2025.10.30 |
| 역사와 문법의 길잡이 (0) | 2025.10.29 |
| 성경의 가치 (1) | 2025.10.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