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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디모데전서 3장 1절 - 7절] 지도자에 대한 교훈 / 감독

[디모데전서 3장 1절 - 7절] 지도자에 대한 교훈 / 감독

 

1. 3장의 기록 목적은? (3장)

 

바울은 속히 에베소로 달려가서 디모데를 만나 목회 전반에 걸친 문제에 대해 교훈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도착이 늦어지더라도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를 잘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본장을 기록하였다(14, 15절).

 

즉 디모데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원할한 치리를 위해 그리고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교회가 되길 바라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이를 위해 바울은 본장을 빌어 교회의 감독과 집사를 임명하는데 있어서 제규정을 정하였다. 바울이 정하고 있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 규정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져야만 하는 교회 정치 제도의 바른 규범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규정이 오늘날 각 교회에서 잘 지켜지지 않고 있음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안타까움에 직면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맡은 직분에 얼마나 충실하며 그것을 잘 감당해 나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들이 교회의 직분을 임명할 때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충실히 일할 수 있는 자들을 선출해야 한다(1-13절).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건실하게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2. "미쁘다 이 말이여'란 귀절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나? (1절)

 

이 말의 뜻은 '모든 사람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일 만한다'(1:15) 혹은 '전적으로 확실하다'라는 뜻이다.

 

한편 학자들간에는 이 문귀가 2:15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본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감독의 직무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첨부된 내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사도 바울은 전장(2장)의 내용을 마감짓고 그보다는 좀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이 귀절을 기록한 것 같다.

 

3. 초대 교회에 있어서 감독은 어떤 직책이었는가? (1절)

 

감독(헬, 에피스코포스)은 오랜 역사를 지닌 직책으로 구약의 '간역자'를 헬라어화한 단어이다(대하 34:17).

 

또한 헬라에서는 시위원을, 로마에서는 시정 감독관이나 국정 감찰관을 '감독'이라 했는데 그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무슨 일을 감독 치리하는 자라는 뜻이며, 둘째는 자기를 임명한 상관에게 책임을 지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 내에서 '감독'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교회의 생활과 사업을 감찰하는 직능과 더불어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을 보살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즉 초대교회 내에서의 감독은 권위를 내세우고 백성을 지배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교회를 받들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봉사자였다.

 

한편 이 감독직은 교회 직제가 발달하면서 연로하고 경험이 있는 교회 지도자를 가리키는 장로(헬, 프레스부테로스)직과 구분이 되었지만 교회 초창기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행 14:23; 20:17;, 28; 벧전 5:1, 2).

 

다시 말하면 초대 교회 내에서 장로는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인데 반하여 감독은 장로가 수행해 가야 할 일의 내용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두 직책간에는 별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 내에 행정적인 제도가 복잡해지고 각 직제의 기능이 전문화되어 가면서 감독은 장로와는 구별된 독립적 기능을 소유한 직임이 되었다. 이때부터 감독은 봉사적 기능보다는 교회 행정과 교육의 수반으로서 지도자적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시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교인을 돌보아 주는 원래적인 의미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가장 높은 어른 또는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 족하다.

 

4. 감독의 직분을 얻기위한 조건은? (1절)

 

그는 선한 일을 사모해야만 한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것을 가르키는 말이라기 보다는 온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모든 일들을 통칭하는 말로 볼 수 있다. 그것은 2절 이하의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바울이 본절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감독의 직능이 비록 행정적이며, 의식적이라고 하더라도 각 성도를 돌보며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위해 마련된 그 직분을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형제를 돌보며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은 정말로 '선한 일'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말을 첨가하여 감독이라는 직책이 세상적인 명예와는 구별된 거룩한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과 긴밀히 연관된 직책임을 강조하였다(참조, 고전 12:31; 14:1).

 

그런데 당시의 상황에서 자원하여 교회의 감독이 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협력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더우기 거짓 선생들은 복음의 참된 기초를 파과하기 위해 온갖 술책을 다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교횔르 돌보는 일을 맡은 데는 반드시 완전한 헌신과 희생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말씀 가운데에는 그 어려운 일을 자원해서 맡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칭찬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목회자의 길이 예전과 같이 큰 핍박은 없을지라도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 유혹과 더불어 자기  극기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매우 힘든 길이다(참조, 고후 11:22-27).

 

하지만 그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이기에 그 어떤 직분보다 더 고귀하고 보람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목회자의 비리와 인품을 나무라기에 앞서 그들이 맡은 직분의 귀중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5. 감독의 성품은 어떠해야 하는가? (2절)

 

감독(監督)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여야 한다.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그 일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감독'은 덕행의 전형이어야 하며,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비행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참조, 딛 1:6).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라는 말은 그 해석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축첩(蓄妾), 일부다처(一夫多妻), 혼외 정사, 사별 후의 재혼 등의 금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감독이 지녀야 할 행동 규범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역시 감독의 성품이 어떠해야 함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감독은 호색(好色)하는 방탕한 기질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항상 자신의 가정을 건실히 가꿔갈 수 있는 신실한 성품의 소유자여야 한다. 한편 여기서 재혼까지 금지한 것은 지나친 것 같으나 감독된 자가 여러 여자의 자녀들을 거느리므로 해서 가정이 시끄러울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감독은 한 아내에게만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참조, 히 13:4).

 

그리고 '절제', '근신', '아담함'은 모두 일정한 관계를 가진 성품들로 질서 있는 생활 태도를 묘사해 주는 말들이다.

 

특히 '절제'라는 의미 속에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나 이것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진지한 삶의 자세를 가르킨다(참조, 딛 1:8; 2:2). '근신'은 '건전한 생각', '신중'등을 의미한다. 사실 감독이 성급한 기질을 가지고 모든 사건과 인격을 함부로 다룬다면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참조, 딛 2:5). 그리고 '아담함'은 '외적 생활이 단정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행위와 모습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항상 모든 사람에게 외적인 태도에서 조차도 호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참조, 2:9).

 

네째, '나그네를 대접하며'라고 했다. 당시는 교통이나 숙박시설이 매우 낙후하여 여행자들이 많은 곤욕을 치뤄야 했던 때라서 나그네를 대접함은 큰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우기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성도들 집에 머물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당시 고아와 과부를 포함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던 것이었다(참조, 롬 12:13; 벧전 4:9).

 

이처럼 한 교회의 지도자인 감독은 그 삶과 성품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수천, 수만이 모이는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교회 내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비난을 받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순수하고 담백한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인간미를 상실한 목회자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6. 감독의 능력과 가정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자질은? (2절, 4절, 5절)

 

먼저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이것은 불신자에게 전도하고 신자를 가르치는 일에 능통한 것을 말한다. 교회의 지도자는 자신의 양떼를 말씀으로 양육할 능력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일을 위해 적극 힘써야 한다(참조, 마 9:35).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복음의 진리를 확실이 알고 있어야 한다. 목회는 분명 은사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며 항상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또한 감독은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조금도 그 품위를 잃어서는 안되며 자녀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만약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잘못 양육된 자녀들이 가져오는 영향력은 다른 교인들의 자녀들에게 해를 가져올 뿐 아니라 감독의 무능까지도 드러내고 만다. 이것은 결국 목회자가 자기의 가정에 충실할 때에야 비로서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비교, 단 11:37; 히 13:4).

 

그런데 5절에 괄호를 친 삽입구적인 질문은 어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흔히 사용했던 전형적인 바울의 문장 스타일이다(참조, 고전 14:7;, 9, 16).

 

교회가 훌륭한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은 큰 복이다. 말씀에 능통하여 진리 가운데로 바로 이끌며 권하는 메시지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 닿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전하는 메시지가 있는 목회자를 만나는 일이다. 이런 면에 목회자는 적어도 자기 가정을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가정이 파괴되고 그 강정의 파괴로 말미암아 가정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가정은 온 교회와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가져다 주는 살아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7. 감독으로서 지켜야 할 사항은? (3절)

 

먼저,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즉 술을 통한 안위와 마음의 평정 또는 쾌락을 절대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에게 미치는 술의 효용성에 관해 언급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참조, 5:23) 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페해를 더 강조하고 있다.

 

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의 지나친 자유를 허용하며 어떤 때는 인간을 '개'로 만들기도 한다. 한 교회의 영적, 윤리적 책임을 맡고 있는 자가 '개'처럼 행동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죄라고 해야 마땅하다. 만약 술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다면 그는 목회를 단념하는 것이 마땅하다.

 

두번째, 구타하지 말아야 한다. 기질이 난폭하여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자가 목회 일선에서 활약한다면 그 교회는 폭력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행동화된 폭력 뿐 아니라 언어로써의 폭력(暴言) 또는 성경과는 무관한 자기 주장의 절대화를 꾀하는 사상적 폭력까지도 포함한다. 어떤 목회자들 가정에 이따금 구타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될 수 없는 잘못이다(참조, 딛 1:7).

 

세번째, 관용해야 한다. 즉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어떤 손해나 아품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남의 허물을 용납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을 때 온 교회는 평안하게 될 것이다(참조, 빌 4:5; 딛 3:2; 약 3:17).

 

네번째, 다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관용의 정신과 통하는 말로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일을 삼가하고 타인의 의견도 수렴할 수 있는 자세를 가르킨다. 논쟁은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끝내 한 공동체와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물론 진리에 대한 바른 입장을 확고히 지니고 있어야 하나 더 이상 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자와 계속 쟁론을 펼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모든 악의 뿌리가 되며 한 인간을 철저히 이기주의자로 만들어 버리는 '돈'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정당한 부의 축적까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인간과 인간 간의 사랑 이상으로 돈을 중히 여기며 또한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돈에 의지하는 악행을 금하는 조치이다(참조, 6:10; 딛 1:8).

 

어떻게 보면 한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한 인격과 더블어 흠이 전혀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요구 조건 때문에 이 세상에 한 사람도 목회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대해 뜨거운 열의가 생긴다면 위에 제시한 여러 행동 규범을 지킬 수가 있을 것이다.

 

8. 새로 입교(入敎)한 자가 감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6절)

 

'새로 입교한 자'(헬, 네오푸토스)란 최근에 개심하여 세례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같은 자들이 너무 급격히 교회의 중책을 맡게 되면 자만심에 빠지게 되거나 그 신안심이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교만하여지다'(헬, 튀포오)의 문자적 의미는 '연기에 싸이다'인데 이는 새로운 개종자가 갑자기 확보된 지위에 대하여 확실한 소명 의식이나 지휘 능력 없이 단순히 자만에 빠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같은 자만심은 결국 그로 하여금 타락의 길로 바지게 만든다(참조, 잠 16:18).

 

또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진다'는 말은 마귀에게 예비된 정죄, 곧 자만심의 죄에 해당하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참조, 롬 16:20; 엡 6:11; 약 4:7; 벧후 2:4).

 

따라서 초신자가 짧은 신앙의 연륜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자랑하여 자신과 교회에 해를 끼치는 잘못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회는 신앙의 연륜과 덕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중직을 맡기고, 아무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함부로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느 직분이나 모두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것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나 자신의 뛰어난 재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의도에서 주어진 것이다. 직분을 맡은 자들은 항상 교회에나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겸손한 신앙인 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남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직분을 맡은 자는 '섬김의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참조, 고전 4:2). 동시에 교회는 성경에 입각한 질서를 유지하고 교회 내에 분란이 전혀 없도록 해야 한다.

 

9. 감독이 될 사람은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7절)

 

감독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는 자라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걸려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교회에 대해 냉담했던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규정은 너무 엄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교회가 불필요한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사실 신앙적으로 온전하고 교회 내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면 사회적으로도 칭찬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신앙인은 비록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발을 이 땅에 딛고 있는 자이기에 이 세상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한편 '비방'과 '마귀의 올무'는 서로 연관된 표현으로 '마귀의 올무'가 곧 비방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만약 도덕적 결함으로 인하여 교회의 지도자가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게 되면 그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로서 마귀의 간사한 술책에 교회가 ??????? 가능성이 높다(참조, 벧전 2:12).

 

교회를 목양하는 목회자는 단순히 교회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진리의 보루라는 입장에서 교회의 지도자는 세상 앞에서도 모범이 될 만한 인격과 삶을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