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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디모데전서 1장 3절 - 7절] 거짓 교리에 대한 바울의 경고

[디모데전서 1장 3절 - 7절] 거짓 교리에 대한 바울의 경고

 

1. 바울이 마케도냐로 갈 때에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 것을 명한 목적은? (3절, 4절)

 

그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神話)와 끝없는 족보(族譜)에 착념(着念)치 말게 하려 함이다.

 

본 절은 역사적으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석방된 후 새로운 여행길에 들어섰을 때의 이야기다.

 

석방 후 바울은 디모데를 대동하고 그레데 섬을 지나 에베소에까지 왔으나 계속해서 동행하지 못하고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 둔 채 마게도냐로 떠났다(참조, 빌 2:24).

 

여기서 '다른 교훈'이라 함은 기독교 정통 교리 이외의 이단적 사상을 가르킨다. 이러한 예 중 하나인 '신화(神話)는 당시에 도시나 명문(名門)의 기원을 어떤 신에게까지 소급시키던 풍조를 가르킨다. 즉 어떤 신이 세상에 내려와서 어떤 성을 세웠다느니, 어떤 집 여자와 혼인하여 한 가문을 세웠다'는 이야기 등이다.

 

또한 '족보'는 명예를 귀하게 생각하던 옛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인데 당시 사회는 헬라의 문화권 속에서 신화와 족보에 집착해 있었다.

 

그런데 이들로 인한 위험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 첫째는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구약 인물들에 대한 훌륭한 상상적 족보를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는 영지주의의 위험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잃게 된 최하급 존재 단계까지의 족보와 전기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신화와 족보의 비슷한 형태를 우리 주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맥 또는 계보와 유사하다.

 

2.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행동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4절)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윤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辯論)을 가져온다.

 

즉 구약의 인물에 대한 족보 만들기는 끝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킴은 물론 그노시스주의 자체가 추론적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은 유식 계급을 자처하며 보통 신도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거만하게 행동했다(6:20).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 계보에 나름대로 단계를 정해 그것들이 인간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계단 곧 신과 인간 사이의 다리라고 했다.

 

그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이다. 그들의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예수는 하나님의 처음 유출자이고, 천사들, 성자들, 사도들과 성도들이 2, 3, 4, 5급의 유출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주장들은 끝없는 논쟁에 모두를 휘감아 버리고 끝내 하나님의 교회에 계급 의식과 분파주의를 조성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예수뿐이다(2:5). 더우기 하나님의 사랑은 만인을 위한 사랑이므로 자칭 유식 계급에 속한 자들에게 뿐 아니라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은 임하게 된다(2:4; 4:10).

 

한편 본 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경륜'이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거룩한 뜻을 정하시고 그 뜻에 맡도록 각자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가리킨다(참조, 엡 1:9).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헛된 지식에 얽매이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화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은 물론 교회에 덕을 끼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참조, 엡 5:15; 골 2:6).

 

3.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요구되는 덕은 무엇인가? (5절)

 

그것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나타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책임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모든 권고의 목표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색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일삼던 그릇된 선생들은 이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된 관심은 지적 만족을 얻는 데만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첫째, 청결한 마음이다. 구약적 의미에서 '마음'이란 단어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총체를 의미하는데 그런 의미에사 청결함이 없는 마음의 고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참조, 마 5:8).

 

둘째, 선한 양심(헬, 쉰에이데씨스)이란 정확한 자기 판단을 뜻한다. 올바른 자기 판단 작용은 성도가 지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이와 비교해서 바울은 배교자들의 양심이 화인맞았다는 사실을 디모데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4:2).

 

마지막으로,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강조했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은 굳건한 기초가 없는 단순한 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의 거짓없는 믿음이란 자신의 이익과 불순한 동기에서 출발하지 않은 신실한 신앙을 가리킨다(참조, 행 15:9).

 

오늘날 교회 내에도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위해 쓸데없는 신학 논쟁만을 일삼는 지도자들이 많은데 이들의 끝없는 논쟁도 결국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 교리를 지어낼 소지가 있다(비교, 시 24:3, 4).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목표가 바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자신을 드러내는 일보다 자신을 비우는 겸손에 더욱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4. 이단들이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6절, 7절)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논리를 펼쳐 율법 선생이 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5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세 가지 필요 조건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표적없이 방황하게 되었다. 즉 5절에 나타난 세 가지 덕을 갖추지 못한 신앙인은 신앙 생활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무의미한 잡담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율법 선생이 되려고 했는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선생되기를 원했던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탐구욕에서가 아니라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혼합된 교리를 전파함으로 공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즉 이들이 율법 선생이 되고자 했던 목적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를 떠나 유대주의적 사고가 존재하는 집단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복음의 진수(眞髓)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권위 의식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려 하지 않고 아직도 옛 관습을 버리지 못한 채 변화되지 못한 불신자들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참조, 요 3:3).

 

그러므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헛된 말'을 남발하는 어리석음을 삼가하고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과 이웃에게 진정으로 유익되게 하는 행동과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공동체 안에서의 권위란 스스로 세우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들이 인정하고 세워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