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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땅 사는 이야기[막벨라, 세겜, 아우라나 타작마당, 사마리아 산]

* 땅 사는 이야기[막벨라, 세겜, 아우라나 타작마당, 사마리아 산] *

1. 막벨라 굴 : (아브라함) 은 400세겔 (창23:15-20)

"15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창23:15-20)

 

[막벨라(Machpelah)]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은 400세겔에 구입한 들과 그곳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창23:9-20).

 

이곳에는 아브라함, 사라(창25:10), 이삭, 리브가(창49:31), 야곱(창50:13) 레아 등이 묻힌 것으로 추축된다.

 

"9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10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2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13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 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5 - 20(위 참조)" (창23:9-2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창25:10).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창49:31).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창50:13).

2. 세겜 땅 : (야곱) 은 100 크시타 (창33:17-20)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창33:17-20).

 

세겜(Shechem) - 인명

(1)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로 히위족속의 추장이다(창33:19, 34:2).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하여 강제로 성 관계를 가진 결과 야곱의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죽고 말았다(창34:2-31).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창34:2).

 

(2) 므낫세 후손 길르앗의 아들 중 하나로 세겜 족속의 족장이다(민26:31).

 

"아스리엘에게서 난 아스리엘 종족과 세겜에게서 난 세겜 종족과"(민26:31).

 

(3) 므낫세 지파 스미다의 아들이다(대상7:19).

 

"스미다의 아들들은 아히안과 세겜과 릭히와 아니암이더라"(대상7:19).

 

세겜(Shechem) -지명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한 성읍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7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등, 어깨"라는 뜻을 지닌 세겜이란 이름은 평지보다 조금 높은 곳인 에발 산 기슭 쪽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지금의 이름은 근처 마을의 이름을 따서 '텔 엘 발라타(Tell el Balath)" 라고 부르고 있다.

 

세겜은 연평균 강우량아 적당하고 물이 많은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농사 짓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보리나 밀, 채소가 재배되었으며 평지를 둘러싼 산비탈에는 포도, 무화과 나무, 감람나무들이 경작되었고 목축에 좋은 풀밭도 많이 있었다(창37:12-13). 헤브론에 살던 야곱이 그의 아들들은 세겜 근처로 보내 양을 치게 했다는 것만 보아도 세겜이 목축에 좋은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창37:12-15).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창37:12-15).

 

또한 세겜은 지정학적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통과하는 곳에 위치하여 사마리아 지방의 교통 중심지였다. 남쪽으로는 산악 지방으로 가는 '큰 길'(삿21:19)이 나 있어 실로, 벧엘,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고, 동쪽으로는 요단강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고, 북쪽으로는 와디 엘 아브라드 골짜기를 따라 뻗어 있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를 지나 도단에 이르는 길과 이스라엘 해안 지방으로 내려가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해변 도로에 닿는 길이 있다.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삿21:19).

 

특히 서에서 동으로 연결된 연결되는 길은 해안 평야에서 요단 동편으로 연결하는 길은 세겜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살아왔으며 강력한 도시를 이룰 수 있었다.

 

[세겜에서 일어난 일]

여러 자연적, 지리적인 조건들 때문인지 세겜에서는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으로 아브라함은 여기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창12:6-7). 또 야곱이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 장막 친 밭을 사고 하나님께 첫 제단을 쌓은 곳도 이곳이었다(창33:20). 야곱의 가족들이 이곳에 묻혔으며(행7:14-16)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요셉의 뼈도 이곳에 묻혔다(수24:32).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12:6-7).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창33:20).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행7:14-16).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24:32).

 

모세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장소로 선택한 곳도 세겜의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이었다(신27장, 수8:30-35).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지만(수20:7) 고핫 자손에게 재분배되었고 도피성이 세워졌다(수24:1-28).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왕으로 등극한 곳도 세겜이었고(삿9:1-6), 더욱 중요한 사건은 솔로몬이 죽은 후에 르호보아이 이곳에서 왕권 확인식을 하려고 갔다가(왕상12:1) 어리석은 처신으로 인해(왕상12:3-15) 이스라엘 백성이 여로보암을 북 왕국의 초대 왕으로 삼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었다(왕상12:20). 그 후 여로보암이 첫 수도로 삼은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왕상12:25).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BC 세기 말 여로보암이 세겜을 차지하고는 성벽과 동쪽 성문의 망대를 재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겜 성 안에 집들이 많이 건축된 것으로 보아 세겜 성의 중요성이나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세겜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적, 제의적인 성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세겜은 하나님과 사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 계약을 맺는 중요한 장소로 공동 운명체 적인 결단을 할 때 모였던 곳이었다. 예루살렘이 통일 왕국의 수도였음에도 르호보암이 왕권 확인식을 세겜에서 하였던 점으로 볼 때 세겜의 제의적인 성소로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하셨던 수가 성은 세겜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창48:21-22, 요4:5, 12).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창48:21-22).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4:5, 12).

 

3. 예루살렘 아우라나 타작마당 : (다윗) 은 50세겔 (삼하24:24)

"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24:24).

 

[타작]

이삭을 떨어 곡식 알갱이를 거두는 것을 말한다. 타작은 타작 마당에서 여러 종류의 타작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대 팔레스타인의 타작 마당은 직경 8-12m 정도의 크기로 대게 곡식 밭이나 바람이 잘 불어오는 언덕 꼭대기에 원형 모양으로 만들어 졌으며(룻3:2, 대상21:15) 타작 마당 주위는 곡식알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테두리를 쌓았다.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룻3:2).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대상21:15).

 

타작은 율법의 순종에 대한 축복(레26:3-13, 신28:1-14)에서도 언급되었는데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순종하면 농작물이 풍부하게 된다는 것으로 "타작이 포도 딸 때까지 미친다"고 했다(레26:5).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보리와 밀의 추수기가 5-6월이므로 7-8월의 포도수확기까지 2개월이나 타작기간이 연장될 정도로 풍작을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레26:5).

 

선지자의 글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것을 '타작 마당에서 타작한 곡식'(사21:10)이라고 했다. 타작 마당은 나곤이나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처럼 개인 소유의 것도 있었으나(삼하6:6, 24:16, 18)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종종 한 마을에 10개 이상되는 타작 마당이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안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사21:10).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삼하6:6).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18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삼하24:16, 18).

 

타작은 보통 타작 마당에 곡식단을 펴 놓은 후 소나 나귀 같은 동물(신25:4, 호10:11)이나 동물을 이용한 타작기로 했다(사28:27-28). 멍애를 맨 동물이 끌었던 타작기에는 봍오 돌조각 또는 철로 된 타작판이 달려 있었으며 사람이 타작판 위에 올라 탄 무게로 인해 곡식의 낟알들이 빠져 나오게 되어있었다(사41:15, 암1:3). 타작마당으로 번역된 원어가 '광장'으로도 번역되었는데 아마도 농한기에는 이곳이 모임 장소로 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왕상22:10).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25:4).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호10:11).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사28:27-28).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사41: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암1:3).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왕상22:10).

 

[타작기의 종류]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된 타작기계는 무거운 수레바퀴를 연결하여 만든 것(사28:27-28), 손에 잡고 곡신 단을 두드려서 곡식의 낟알을 떨어뜨리는 도리깨(사28:27) 등이 있다. 타작을 하는 기간에는 곡식을 약탈하는 사람들로부터 곡식을 지키기 위해(삼상23:1), 또 저녁 무렵에 부는 바람을 이용하여 곡식을 까부르다가 타작 마당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룻3:2-7).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삼상23:1).

 

그리고 타작에 사용되는 타작기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도 성경에 나온다. 악어의 배를 깨진 기와 조각 같은 날카로움에 비유하여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욥41:30)라고 하였다. 아모스는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을 향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암1:3)는 표현을 통해 길르앗을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힌 아람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선포하였다.

 

4. 사마리아 산 : (오므리) 은 두 달란트 (왕상16:23:24) 

"23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24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왕상16:23:24).

 

[사마리아]

북 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한다. 세겜에서 서쪽으로 약 20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7km, 지중해로부터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성읍이다.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말은 사마리아 성의 확대된 지역의 이름이다. 원래 세겜, 사마리아, 이블르암, 므깃도 같은 도시들은 므낫세 지파의 영토였는데(수17장), 이 므낫세 지파의 땅을 어림잡아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사마리아라는 도시가 북 이스라엘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신 일이 있듯이(요4:5), 이 이름은 신약 시대에도 한 지방 전체를 가르키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사마리아의 지경은 동쪽으로는 요단 강, 서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이스르엘 골짜기가 그 경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의 기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각축을 벌이던 중,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BC 885- 874)이 디르사에서 6년간 통치한 후에 세멜(Shemer)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산을 두 달란트에 사서 도성을 건설하고 그 산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라서 '사마리아'라고 했다(왕상16:24). 즉 '세멜'이라는 개인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쇼므론'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고, 이것이 라틴어와 헬라어 발음으로 '사마리아'가 된 것이다.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왕상16:24).

 

[사마리아의 번영과 쇠퇴]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가 사마리아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한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새로운 도성을 세운 것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곳은 해안도로와 연결되기 좋은 지역 이었으며, 효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기에도 좋은 위치였다.

 

오므리는 집권 후 처음 6년 동안 안으로 국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한편 밖으로는 유화정책을 병행해갔다. 그는 손녀 아달랴를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 예호람(요람)과 결혼 시켜서(왕하8:26) 불편한 관계에 있던 남유다와 관계를 개선했다(왕하 8:18, 대하 2;16, 22:2). 나유다와의 안정된 관계는 북방정책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또한 그의 아들 아합을 두로 왕 엘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켜 조약을 맺기도 했다(왕상 16:31). 사마리아는 이후 100년 이상 이스라엘에게 난공불락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새로운 도성 사마리아는 오므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도 사마리아를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의 통치 기간에 아람(수리아) 왕 벤 하닷 2세의 두 번에 걸친 침공을 받았으나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겼다(왕상 20장). 요람 왕 때 곧 엘리사가 활동하던 때에 다시 침공을 받아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으며, 이로 인해 극심한 기근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겼다(왕하 6:8 이하). 이스라엘의 16대 왕이었던 므나헴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유화정책을 통해 사마리아를 보호할 수 있었으나 반 앗수르 노선을 걸었던 군대 장관 베가에 의해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 왕이 암살되고, 이로 인해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왕하 15장). 이와 같은 정책은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왕하15:29).

 

사마리아는 오랫동안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수난을 당해야 했는데, 그 수난의 역사 가운데 가장 혹독했던 것은 앗수르의 침공이었다. BC722년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스라엘과 사마리아가 멸망하고(왕하17:3-6),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당시 앗수르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앗수르는 그곳에 여러 지역으로부터 온 식민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왕하17:24). 앗수르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이스라엘을 차례로 지배하게 될 때마다 사마리아는 늘 영향을 받았다.

 

사마리아는 BC108년 하스모니안 가의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재건되기 시작하다가 BC30년 헤롯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건되었다. 헤롯은 사마리아를 로마풍으로 재건하고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의 후견인이자 로마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어 표기인 '세바스테'라고 명영했다. 이곳은 유대전쟁(AD66 - 70)으로 다시 파괴되었으며, 5세기 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